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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9 (17:03:34)
손 안의 원고지 '문자메시지'  (조선일보2001.08.28)

열두 줄로 날리는 ‘디지털 사랑고백’

국내 '휴대전화 편지' 하루 6400만통

휴대폰으로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들이 놀랄만큼 다양해지고 있다. 짤막한 메모 정도가 아니라 절절한 사랑 고백에서 생일 축하까지, 마치 문학작품 창작하듯 글쓰고 주고받는다.

다이얼링 버튼을 키보드처럼 눌러 LCD창에 글자를 새겨 보내는 문자메시지(SMS) 기능이 널리 쓰이면서 휴대폰은 ‘디지털 원고지’로 진화했다. 휴대폰 가입자 수 2800만명 시대. 국내 4개 이동통신 회사를 통해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는 하루 평균 대략 6400만건이다. 한달 19억, 연간 230억 통의 디지털 편지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건당 30원으로 저렴한 요금도 ‘디지털 우체국’을 붐비게 하는 한 요소.

‘문자 고수’들의 메시지 타수는 분당 300타에 이른다. 컴퓨터 키보드로도 쉽지 않은 속도다. ‘문자’에 익숙한 중고생들은 수업시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손만으로도 친구에게 문자를 ‘날린다.’ 직장인들은 회의도중 애인에게 휴대폰으로 ‘실시간 연애편지’를 쓴다. 인터넷에선 문자메시지 경시대회가 열려 ‘휴대폰 신춘문예’ 탄생의 서곡을 연주한다.

휴대폰 액정화면에 쓸 수 있는 ‘원고 매수’는 보통 40자(또는 80바이트)쯤이었다. 그러나 최근 LCD창이 8줄, 12줄로 커지면서 최대 한글 96자, 영문 144자까지 쓸 수 있게 됐다. 원고지 0.5매가 휴대폰 창에 뜨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단순 연락 메모뿐 아니라 문학적 향기가 밴 짧은 글들까지 주고받게 됐다. ‘디지러티(Digital+Literati)’라고 불리는 ‘문자 세대’들이 문자와 숫자, ‘(^^)’ 등과 같은 이모티콘(Emotion+Icon)을 버무려 생산해내는 새로운 장르의 글들을 ‘디지러처(Digital+Literature·디지털 문학)’라고 부르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문자 메시지는 차가운 디지털 문화 속에 아날로그 정서를 심는다. 회사원 홍준의(33)씨는 지난 생일, 아내 송미진(30)씨로부터 잊지못할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당신을 보내신 신에게 감사해
나에게로 온 당신에게 감사해
따로 또 같이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에
함께 있다는 것에도 감사해

홍씨는 이 메시지를 한동안 지우지 못했다. “전화로 ‘생일 축하해’ 하는 것보다 얼마나 정이 넘칩니까. 꼭 연애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군요.”

지난 3월 서울 홍제동 화재현장에서 숨진 소방관 박준우(31)씨는 약혼녀 장미경(31)씨에게 전날 문자메시지를 남겼었다. “걱정하지 말고 잘자/꿈에서 밤새 지켜줄게” 빈소에 온 장씨는 휴대폰에서 묻어나는 약혼자의 체취에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무선인터넷 사이트 ‘엠프리아이닷컴(www.mfreei.com)’은 7월 24일부터 지난 23일까지 ‘문자 & 이모티콘 경시대회’를 열었다. 80바이트 이내 화면에 작성한 메시지 중 인기높은 작품들을 시상했다. 한달간 모두 1459건이 응모됐으며, 최우수상은 이모티콘으로 팥빙수를 그리고, “덥지? 팥빙수 먹어!”라고 쓴 응모자가 차지했다. 상품은 물론 문자메시지를 200번 전송할 수 있는 사이버머니였다. 우수상은 “도착 알림/ 귀하께 아름다운 하루를 배달합니다/ 행복이 가득한 하루 되십시오”였다.

모든 문자메시지가 ‘감상적’인 것은 아니다. “귀하는 ○일까지 ○○○계좌로 ○○○원을 입금하셔야 합니다” 하는 은행 빚독촉도 문자로 뜬다. 어느날 ‘경품 당첨’이란 메시지에 별 생각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인터넷 성인방송 요금이 결제되었습니다’ 하는 황당한 상혼도 있다.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수십만 시위대는 문자메시지로 서로 연락했고, 중국 파룬궁 회원들, 그린피스 시위대도 휴대폰으로 교신한다. 아랍에미리트에서는 한 26세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는 메시지만 받고 이혼당했다.

영어권에선 ‘문자’라는 뜻의 명사‘text’에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다’라는 동사로서의 뜻이 첨가됐고 우리나라에선 ‘엄지족(엄지손가락으로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란 신조어도 나왔다. ‘문자 메시지 통증(TMI·Text Message Injury)’이라는 손가락 질병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이용한 ‘디지러처’ 열기는 식지 않을 것 같다. ‘좋은 문자메시지’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접속자는 폭발적 증가추세다. 문자메시지 전문사이트 ‘슈어엠(www.surem.com)’ 백남욱(35) 사장은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 사이트에 올리는 문자 메시지가 수천 건씩 쌓이고, ‘베스트 문자’는 다운받아 전송하는 사람도 월 50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 8 ×5=40字에 담긴 사연들

‘휴대폰 문학’이라고 할 문자메시지는 짧은 글에 풍부한 감성을 담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가로 8자, 세로 5자인 이 좁은 ‘원고지’는 띄어쓰기를 좀처럼 허용치 않는다. 그러다보니 ‘다음’을 ‘담’으로, ‘내일’을 ‘낼’로 축약된다.

그러나 ‘디지털 하이쿠(俳句)’라고까지 불리우는 메시지들은 문자 대신 감정을 농축시키는 문학적 묘미를 준다. 40자 이내로도 한편의 훌륭한 시가 된다.

천년에 한번
비내리는 나라가 있어
그 나라가 빗방울로
물에 잠기는 날까지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우리 둘이 다 땅콩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항상 같은 껍질 속에
함께 있을텐데

휴대폰 창의 특성을 응용한 문자메시지도 재미있다.

○○님께서 400개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메모리 부족으로
세 글자만 수신합니다
사랑해

너의 마음
다운로드중
■■■■□90%
다 줄거지?

LCD창 세줄을 모두 숫자 ‘3’으로 채우고 그 가운데 ‘YOU’를 새겨넣은 문자메시지 끝에는 이렇게 써있다. “내 삶(3)속엔 항상 네(YOU)가 있어” 그런가 하면

1생동안
2몸 다바쳐
3백년이 지나도
4랑할 것입니다
5직 당신만을

이란 메시지도 인기 높다.

가로줄 8자가 기본인 문자메시지는 ‘8언절구’도 만들어낸다.

손가락이 삐었는가
삽십원이 아까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기척이나 하고살자

는 식이다.

‘문자메시지 경시대회’를 주관했던 ‘엠프리아이닷컴’ 백남봉(33) 기획팀장은 “이모티콘 열풍이 불던 과거에 비해 문자로만 메시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면서 “휴대폰 창이 커지면서 ‘창작 능력’도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 한현우기자 hwha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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